■ 도서소개
1994년 “시의 천지와 시의 지천을 만들자”는 뜻을 모아 결성된 <시천지> 동인들의 아홉 번째 시집. 무릇 ‘동인’이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자 ‘딴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사람’을 일컫는다. 이처럼 동인은 관심이 있는 분야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자 어떠한 결사체에 필요한 ‘딴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사람’이다. <시천지> 동인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 출판사 리뷰
시의 천지를 꿈꾸며

〈시천지〉 동인은 “시의 천지와 시의 지천을 만들자”는 뜻을 함께 해온 시인 결사체이다. 1994년에 ‘하늘과 땅이 어우러진 시’, ‘좋은 시가 천지인 세상’을 모색하면서 서울의 문화거리인 대학로에서 결성하였다. ‘시의 천지화’, ‘좋은 시의 지천화’를 꿈꾸며 우리는 1995년 『상처의 곳간: 천지 안에서의 건강을 꿈꾸며』라는 첫 동인지를 펴냈다. 문학의 공정한 교류와 유통에 뜻을 같이한 동인들은 이후 여덟 권의 동인지를 펴냈다. 이들이 바로 2022년에 『달을 먹은 고양이가 담을 넘은 고양이에게』라는 아홉 번째 동인지를 펴내는 ‘그 사람들’이다. 제1집 간행 당시에는 8명의 동인이었지만 지금은 11명의 동인이 참여하고 있다.

제8집의 해설에서 우대식 시인이 ‘멀고 먼 서정의 끄트머리’라고 제목을 붙인 것처럼 제9집에서도 서정의 실타래는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이나명 시인의 「한없는 자리」 외 9편, 박수빈 시인의 「그 회의록」 외 9편, 진영대 시인의 「썰물」 외 9편, 서주석 시인의 「심우꽃」 외 9편, 윤정구 시인의 「한 뼘」 외 9편, 최영규 시인의 「설산 아래에 서서」 외 9편, 오석륜 시인의 「강의실에 흐르는 강」 외 9편, 한이나 시인의 「파릉의 취모검」 외 9편, 고영섭 시인의 「마음을 사는 일」 외 9편을 모아 90편을 담았다. 김성오, 김영교 동인은 부득이 함께하지 못했다. 이번 수록작들 대부분은 갓 길어 올린 ‘날것의 작품’ 또는 여러 문학지에 실린 작품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천지〉 동인의 아홉 번째 여정이라는 흐름에는 모두 닿아 있다. 사반세기를 넘어 30년을 향해 가는 동안 동인들은 서로의 들숨과 날숨을 들을 수 있는 귀 명창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동인지는 〈시천지〉 동인의 시적 완성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들의 관록과 저력이 보여주는 것처럼 동인들의 숙성된 작품들은 상승의 관계를 열어가고 있다. 시인들이 꿈꾸는 세계는 향상(向上)의 세계로 이어지고 작품들이 도약하는 방향도 상향(上向)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시여! 훨훨 날아라! 시인이여!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서 더 크게 펼쳐라! 그리하여 시의 천지를 우주에 드리워라!

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
이나명

왜가리가 물속에 두 다리를 담그고 멍청히 서 있다
냇물이 두 다리를 뎅강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왜가리가 빤히 두 눈을 물속에 꽂는다
냇물이 두 눈알을 몽창 빼가는 줄도 모르고

왜가리가 첨벙 냇물 속에 긴 부리를 박는다
냇물이 제 부리를 썩둑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두 다리가 잘리고 두 눈알이 빠지고 긴 부리가 잘린
왜가리가 퍼드득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떠오른다

아주 가볍게 떠올라 하늘 깊이
온몸을 던져 넣는다
냇물도 하늘로 퍼드득 솟구치다
다시 흘러간다

원고지
박수빈

벼랑 같은 아파트들

언제부터 이 칸을 위해 역병처럼 사는지
마스크를 쓰고 마신 숨을 다시 뱉는다
밤이 되면 불 꺼진 口에 눕는 생은 행간 밖

무릎을 꿇다가도 낙타처럼 일어서고 싶은데
태양 아래 끓어오르던 그 길은 어디로 가고
삭제된 口들로 채워지는 공백

포클레인 자국이 길을 만들면서부터
파헤친 흙만큼 산이 생기고
나의 쓸모는 모래가 바퀴에 들러붙는 듯했다

누군가 타워크레인을 옮겨놓자
레미콘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시멘트 채운 몸에 눈물을 버무리며
바람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며

거대한 공사판의 나는 먼지로 사라지고, 살아지고

복장(腹藏)
진영대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멩이 하나 박혀 있었다

드릴 것이
그것뿐이라

아무 소원도
적어놓지 못하였다

천년만년 가슴속에
묻어둘 것이
돌멩이 하나뿐이라
금동보석함에 담아서 드리기도 무엇해서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꾹꾹 눌러 끼워놓았다

그것이 무슨 보석이라고
돌멩이 위에
두툼하게 덧살을
붙여가고 있었다

■ 작가소개

지은이 : 시천지 동인

■ 목 차

이나명

한없는 자리14/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15/늙은 매미16/응답18/경계를 지우다20/나를 실감하다21/조그만 호두나무 상자22/참새들24/저녁을 위하여26/하산28


박수빈

그 회의록30/스프링31/원고지32/들꽃 요양원34/쌀이 물 먹는 소리35/스마트 팜36/플라스틱 섬37/숨38/블랙 미러39/검은 사람들이 내려온다40


진영대

썰물42/놓지 마43/줄44/금가락지45/복장(腹藏)46/봄, 윤회48
빈집49/귀천50/절개지(切開地)51/술병처럼 서 있다52


서주석

심우꽃54/견적꽃55/견우꽃56/원형꽃57/목우꽃58
치유꽃60/참나꽃61/비움꽃62/부활꽃63/나비꽃64


윤정구

한 뼘66/세인트 히말라야67/아버지의 아버지68/산수유 화엄70/너구동의 봄71/사슴벌레72/사과 속의 달빛 여우74/일편단심(一片丹心)76/유리시경(琉璃詩境)78/복음80


최영규

설산 아래에 서서82/바람이 되어, 바람의 소리가 되어84/야크86/빙하88/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89/크레바스90/높이의 힘92/심정(心旌)94/너도 나비96/눈사태98


오석륜

강의실에 흐르는 강100/아름다운 파업101/사랑의 빨래102/파도 소리104/나비효과105/사과꽃106/아름다운 꽃밭108/강가에서109/낙동강110/설중매 1112


한이나

파릉의 취모검114/붓꽃 춤116/버들잎 관음도117/심죽(心竹)118/색경(色經)119/먼지의 시간120/나의 사막122/환생의 방식124/새들의 상처126/만어사(萬魚寺) 종소리128


고영섭

마음을 사는 일130/전신투지가131/매력을 얻는 일132/사람을 만나는 일133/시의 날을 기리는 노래134/태산에 올라보니136/상주행 완행열차138/반가사유140/이 순간에 살아야141/놀라운 하루142